문서의 임의 삭제는 제재 대상으로, 문서를 삭제하려면 삭제 토론을 진행해야 합니다. 문서 보기문서 삭제토론 사나다 노부시게 (문단 편집) === 유년기 ~ 청년기 === [[사나다 마사유키]]와 야마노테 사이에서 차남으로 태어났다. [* 일설로는 측실의 자식이라고 하기도 하다. 일설에 노부시게는 형 노부유키보다 한 살 위로 1565년에 태어났다고 한다. 이 설에 따르면, 야마노테도노는 노부시게의 존재를 알게 되자, 친자식으로서 키우는 대신에 노부유키보다 한 살 아래의 동생으로서 취급하였다고 하나, 확실한 사료적 증거는 없다.] 아버지인 [[사나다 마사유키]]는 본래 시나노 북부의 호족으로, 다케다 가문을 섬기고 있었다. 본인이 받들던 다케다 가가 멸망한 이후 [[오다 노부나가]]에게 복속, 그러나 3개월 후, 그가 [[혼노지의 변]]으로 죽자, 우에스기 가, [[호조 우지나오]]와 동맹, 하지만 3개월 후에는 호조 가를 배신하고 [[도쿠가와 이에야스]]와 동맹. 이에야스가 자신의 영지인 누마타 지역을 일부를 호조 가에게 양도하려고 하자 거부하고 다시 [[우에스기]]와 동맹, 분노한 이에야스와는 제1차 우에다 성 전투를 치르고, 이에 [[도요토미 히데요시]]에게 복속, 히데요시가 나서 화해를 주선하고 영지를 인정받는다. 독립 직후 여러모로 상황이 불안정하였으므로 전국시대의 관습에 따라 동맹의 조건으로 노부시게는 우에스기 가문에, 형인 노부유키는 도쿠가와 가문에 볼모 생활을 했다. 노부시게는 우에스기 가에 인질로 간지 얼마 안 돼서 또 1587년 토요토미 가에 인질로 가는데, 인질이었지만 우에스기 가나 도요토미 가에서나 좋은 대접을 받았다고 한다. 말이 인질이지 실질적으로는 항복하고 복종해온 가신의 아들이라 나중에 자신의 가신으로도 써먹을 인재들이라, 학문도 가르치고 잘 대접하는 것이 이 시대의 당연한 관습이었다. 도요토미 가에서는 도요토미 성도 받고 '사에몬노스케'라는 벼슬도 받았다. 형인 노부유키가 받은 '이즈노카미'와 품계상으로는 같지만 사에몬노스케는 명목상 내직이고 이즈노카미는 명목상 외직이기 때문에 정 비교하자면 사에몬노스케가 더 높다. 가문의 후계자보다 차남이 더 좋은 자리에 있었던 드문 케이스랄까. 히데요시에게 겐지로라는 별명으로 불렸던 것을 생각하면 상당히 좋은 대접을 받았음을 유추해볼 수 있다. 노부시게의 아버지 마사유키는 실질적인 다케다 류 군학의 계승자로, 도요토미 시대 때나 도쿠가와 시대 때나, 언제나 소규모 영주이면서도 견제를 많이 받았다. 1594년 경에 [[토요토미 히데요시]]의 측근이었던 [[오오타니 요시츠구]]의 딸과 결혼. 일설에는 [[이시다 미츠나리]]의 처조카라는 인연으로 맺어졌다고도 한다. 노부시게의 어머니 야마노테가 이시다 미츠나리의 처형이라는 설이 있다. [[임진왜란]]때는 500명의 병사로 조선에 출전을 명받았지만 결국 이뤄지지않았고, 히데요시가 전진기지로 삼았던 히젠 [[나고야]] 성(肥前名護屋城)의 산노마루를 지키는 친위대 역할의 [[하타모토]] 벼슬을 했다.저장 버튼을 클릭하면 당신이 기여한 내용을 CC-BY-NC-SA 2.0 KR으로 배포하고,기여한 문서에 대한 하이퍼링크나 URL을 이용하여 저작자 표시를 하는 것으로 충분하다는 데 동의하는 것입니다.이 동의는 철회할 수 없습니다.캡챠저장미리보기